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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V)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11월20일 17시0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10> 태부 원상 축출과 고구려 후손 고조의 등장(AD504)

 

북위 조정의 태부, 영사도 녹상서 북해왕 원상은 원굉과 고씨(문소황태후)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고 황제 원각의 작은 삼촌이었다. 탐욕스러웠고 극도로 사치했다. 다른 사람의 집이나 여자를 빼앗았으며 이곳저곳 청탁을 하고 다녔으므로 원성이 자자했다. 원각이 AD501년 친정을 선언했을 때 함양왕 원희, 팽성왕 원협, 그리고 북해왕 원상 등을 궁으로 불러 자신에게 협조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때 원상의 어머니 고씨는 원상이 크게 견책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수레를 타고 따라가면서 울었다. 그러나 원상이 무사할 뿐만 아니라 그 후 높은 직책으로 등용되게 되자 고태비는 원상과 함께 더욱 탐욕하고 포학스럽게 행동했다.

 

원상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 관군장군 여호라는 간신과 결탁하였다. 또 한사람 황제의 총애를 받은 사람은 고조였는데 그는 고구려 사람으로 누이가 문소황태후 고씨였고 조카는 황제의 비 고황후(고영)였으므로 강력한 인척이었다. 그러나 당시 원상을 비롯한 조정에서는 그가 고구려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경시하고 배척하였다.  

 

고조는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 원상이 여호 등 측근들과 함께 모반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밤중에 중위 최량을 불러 원상 무리들을 탄핵하라고 지시했다. 원상 무리들은 다 체포되었는데 원상은 자기가 물건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져온 것이라고 발뺌했지만 소용없었다. 재판결과 모두에게 사형이 내려졌다. 황제는 다른 친왕들을 이끌고 재판 현장에 갔다. 황제는 원상의 사형을 감면하여 서민으로 강등시켰다. 고태비는 아들 원상이 행한 간통죄(친척 아저씨 안정왕 원섭의 비 고씨를 간통했음)를 괘씸하게 여겨 100대의 채찍질로 때려 그의 상처가 썩어졌고 10일이나 못 일어났다. 원상의 노복들이 몰래 원상을 빼돌릴 생각을 시종에게 전달하는 도중에 발각이 되었다. 원상은 깊이 통곡하고 원통해 하다가 갑자기 죽었다. 원상과 여호 무리들이 죽고 나자 이제 모든 권력은 고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황제의 근위병을 장악한 고조는 여러 친왕들을 가두고 유폐시켜서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팽성왕 원협이 간절히 막았으나 원굉은 듣지 않았다.  

 

<111> 최광의 경고(AD505)

 

작년(AD504)에 사원현이라는 관료가 병아리 한 마리를 올렸는데 다리가 넷, 날개가 넷이었다. 기묘한 병아리를 보고 북위 황제는 시중 최광에게 무슨 뜻인지 물었다. 최광은 전한 나라 때 수탉으로 변한 암탉의 예와 뿔이 달린 수탉의 예를 들면서 간신 잡배 무리가 큰 권력을 잡고 휘두르면서 나타나는 국가망조이고 이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은 현명한 군주께서 나라르 바로잡으라는 경고라고 설명했다. 곧이어 여호 등이 잡혀 죽는 것을 보고 황제는 최광의 말을 깊이 믿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다음해(AD505) 여름에 황궁 태극전의 서쪽 처마 밑에서 영지가 자라는 것이 발견되었다.황제는 그 뜻이 무엇인지를 최광에게 물었는데 최광은 그것이 불길한 징조라고 해석했다. 즉, 영지는 어둡고 습하고 외딴 곳에서 자라는 법인데 황궁 한 복판에서 자란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징조이니 군주가 경계삼아 정치를 잘하라는 징조라는 것이었다. 술 마시기를 절제하시고 전쟁을 피하시며 백성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도록 노력하라는 경고였다는 것이다.

    


<112> 양의 반격 : 종리 전투(AD505-AD507)

 

AD505년 겨울 양나라는 북위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양주자사 임천왕 소굉을 도독북토제군사, 상서우복야 유담을 부장으로 삼아 낙구(안휘성 회원)에 진을 쳤다. 북위는 중산왕 원영에게 도독양서이주제군사라는 직을 내려서 10만 대군으로 양나라를 막도록 했다. 양에서는 왕무를 보내 위를 공격하도록 했고 위는 양대안을 보내 왕무를 격퇴시켰다.(AD506년 3월16일) 원영은 장수 양대안을 보내 낙구 동남쪽 종리(안휘성 봉양)를 습격하도록 했다. 북위 조정에서는 형만을 도독동토제군사로 임명하여 동쪽 방면 공격을 주도하게 하였다. 형만의 군대는 양나라 군대를 연이어 격파하고 남진하여 양대안과 함께 숙예(강소성 숙천)를 함락시키고 양나라 장수 남회공을 죽였다. 

 

북위 조정에서는 형만과 중산왕 원영이 힘을 합하여 양성(안휘성 수현 동남)을 함락시키라고 명령했다. 수비에 치중하던 소굉이 물러나려고 하자 부장 마선권이 크게 소리 지르면서 후퇴를 반대하고 나섰다. 소굉은 두려움에 질려서 나아가지도 않고 후퇴하지도 않고 버티었다. 북위에서는 양나라가 겁을 먹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진격을 하자가 권했으나 원영 또한 양나라의 힘을 우려하여 진격하지 않고 관망하기로 했다. 마침 낙구에 폭풍이 몰아치고 천둥소리가 천하를 뒤흔들자 소굉은 혼비백산 도망치고 말았다. 죽은 양나라 군사가 5만이 넘었다고 기록되었다.(AD506년 6월 27일)         

 

북위조정은 중산왕 원영에게 이긴 기세를 타고 더욱 남쪽으로 진격하라고 지시하자 원영은 나아가 종리(안휘성 봉양)을 포위했다. 북위황제는 형만에게 편지를 보내 종리로 가서 원영과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형만은 양나라가 수성에 강하고 또 북위군대가 너무 오래 전쟁에 참가하여 피로하니 갈 수가 없다고 반대했다. 조정에서는 다시 조서를 내려 진격하라고 명했지만 형만 또한 다시 표문을 올려 적의 배후를 습격하는 것은 몰라도 남쪽으로 진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위 조정에서는 형만을 소환하고 그 대신 진동장군 소보인을 원영에게 보내 함께 종리를 함락시키도록 했다. 

 

시중 노창은 평소에 형만을 매우 시기하였으므로 시중 원휘와 함께 그를 헐뜯었다. 그런 정황을 알게 된 형만은 시중 원휘에게 자기가 얻은 미녀를 주어 환심을 샀다. 원휘가 황제에게 말했다.

 

  ” 형만은 조정에 큰 공을 세운 사람입니다. 

    노창이 탄핵하는 사면 이전의 옛날 일을 가지고 

    문책하시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형만은 겨우 벌을 면할 수가 있었다.

 

AD507년 1월 원영은 양대안과 함께 수십만 대군으로 종리를 공략하였다. 성 안에는 창의지와 3천의 군사가 필사적으로 방어를 하여 위의공격을 막아냈다. 원영이 뚜렷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자 2월 소환령을 내렸는데 원영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간청했고 조정에서는 범소를 급히 현지로 파견하여 공격을 재촉했다. 범소는 현지 상황을 보고나서 퇴각하자고 건의했지만 원영이 듣지 않았다.

 

양나라 황제는 예주자사 위예에게 명령하여 종리를 구원하도록 하고 조경종의 지시를 받도록 했다. 위예는 밤사이에 해자를 파고 목책과 성채를 건축하여 방비에 나섰다. 위나라는 하룻밤 사이에 새로운 방어막이 구축된 것을 복 귀신이 도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놀라워했다.양대안의 1만 기병으로 공격했지만 양나라 군사를 이길 수가 없었다. 원영과 북위군은 마침내 물러났다. 그리고 퇴각하는 동안 10만 이상의 북위군이 죽었다.(AD507년 3월) 북위 조정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원영과 소보인을 죽일 것을 요청했으나 서민으로 깎아 내리고 양대안은 병졸로 강등시켰다.  

 

 

<113> 경조왕 원유(元愉) 반란(AD508)

 

북위 황후인 우씨가 지난 해 말에 죽었다. 아마도 귀빈 고씨(당시 실세 고조의 조카 고영)가 관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었다. 원각은 다음해(AD508년) 7월 고귀빈을 황후로 올렸다. 이 전 3월에는 우황후의 아들 원창이 병이 들어 죽었는데 어의 왕현이 고조의 살해의 뜻을 몰래 실행에 옮긴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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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카가 황후가 된 고조는 권력이 더욱 높아지자 조정의 옛 제도를 많이 고치고 또 봉지와 녹질을 줄였으며 공신들을 억누르고 쫓아내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고개를 숙여 복종했으나 다만 탁지상서 원광은 스스로 관을 만들어 청사에 두고서 고조의 잘못을 낱낱이 드러내고 자결할 생각까지 을 품은 적이 있었다. 원광은 고조를 지록위마 한다고 표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재상(고조)를 무고했다는 혐의를 받아서 탄핵을 받았다. 유사는 원광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했지만 관직만 광록대부로 강등되고 말았다. 황제 원각에게는 배다른 동생 원유가 있었다. 황제 원각은 동생 경조왕 원유에게 우황후 동생을 비로 맞게 하였으나 원유는 우씨 대신 첩 이씨를 사랑하여 원보월이라는 아이를 낳았다. 우황후는 이씨를 궁으로 불러 몹시 매질을 하고 남편에게는 원유의 방탕함과 사치함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황제 원각은 원유를 직접 황궁으로 불러서 잘못된 행실을 꾸짖고 50대 장형을 내린 다음 기주자사로 쫓아냈다. 

 

여러 가지로 불만이 쌓인 데다 고조가 자꾸 자심을 참소하는데 대해 앙심을 품은 원유는 자신의 부하들(이들은 사실상 조정에서 감시 차 내려 보낸 관료들이었다) 장사와 사마를 죽이고는 고조가 황제를 죽이고 반역하려 하므로 이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신도(하북성 기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상서 이평을 도독북토제군사로 삼고서 토벌에 나섰다.(AD508년 8월) 이평은 원유를 생포하여 낙양으로 압송했다. 원유가 야왕(하남성 심양)에 도착했을 때 고조가 사람을 보내 원유를 죽였다.

 

 

<114> 팽성왕 원협의 죽음(AD508)

 

우황후가 죽고 나서 고귀빈을 황후로 세우는 문제에 대해 팽성왕 원협은 극구 반대했다. 이미 고씨가 문소황태후 때부터 세력이 너무 강했는데 또 고씨를 황후로 세우면 모든 것이 고씨 휘하로 들어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조정 실세 고조와의 갈등이 불가피해졌다. 황제 원각은 고조의 말대로 고씨를 황후로 책봉했다. 고조는 원협이 그의 장인과 반란을 일으킨 원유가 내통했다는 무고를 들이대며 술수를 써서 황제가 믿도록 계략을 꾸몄다.

 

황제는 9월 18일 날을 잡아 친왕을 모두 궁으로 불렀다. 고양왕 원옹과 광평왕 원회와 광양왕 원가, 청하왕 원역이 고조와 함께 들어왔으나 팽성왕 원협은 부인의 출산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다. 중사들이 계속 들어 와 참석을 재촉하자 팽성왕 원협은 마침내 부인을 두고 궁으로 들어갔다. 이미 늦은 시각이라 연회는 거의 파한 상태였는데 무사들이 독주를 들고 와마실 것을 강요하였다. 원협은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외친 다음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 이미 죽은 원협의 시체를 무사들이 다시 찔러 죽인 다음 새벽에 시신을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이씨에게 말했다.

 

  ” 왕이 너무 많이 취해서 죽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조의 위세에 심하게 꺾였지만 이런 소문들이 흉흉하게 나돌았다.

 

  ” 고령공(고조)이 사실을 구부려서 현명한 왕을 죽였다.“

 

 

<115> 원각의 아들 원후 출생과 모후 호충화(AD510)

 

AD510년 3월 14일 황제 원각의 비 호충화가 아들 원후를 낳았다. 처음 호충화가 궁으로 들어오자 주변에서는 왕자나 공주는 낳더라도 태자는 낳지 말라고 권했다. 태자의 모후를 죽이는 선비족의 관습을 가르쳐 준 것이다. 호충화가 이렇게 말했다. 

 

  ” 첩의 생각은 다릅니다.

    어찌 자기 한 몸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나라에 후사를 없게 하겠습니까?“  

 

임신하게 되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도망갈 것을 권유했지만 스스로 다짐했다.

 

  ” 만약 남자 아이를 낳게 된다면

    차례에 따라서 맏이가 되는 것이니 

    내 몸이 죽더라도 유감이 없다.“

 

황제는 여러 아들을 낳고도 다들 살아남지 못하여 걱정이 많았으므로 아들 원후를 더욱 깊고 신중하게 보호하여 황후나 호충화나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유모를 두어 별궁에서 양육했다. 이년 뒤(AD512) 원후가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이때부터 태자의 모후를 죽이지 않는 법도가 생겨나 호충화를 죽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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