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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6-1 : 전한前漢의 창읍왕 유하(BC92-BC52) <F>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09월17일 16시50분
  • 최종수정 2021년09월08일 13시37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4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둘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19> 연왕 유단과 유택의 반란(BC87) 

 

무제가 지난 해 죽으면서 모든 제후 친족들에게 왕의 옥새가 찍힌 조서를 내려주었다. 무제의 세 째 아들, 사실상의 장자 연왕은 조서를 받고서는 의심했다.

 

      ” 옥새조서의 봉투가 작은 것을 보니 경사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다.“ 

 

즉시 세 명을 장안으로 보내 조문을 명분으로 내세워 비밀리에 조정을 염탐시켰다. 마침 조서가 내려와 유단에게 삼 십 만전과 삼천호의 녹읍을 추가한다고 하자 화를 벌컥 내어 말했다. 

 

      ” 내가 당연히 황제가 되어야 하는데 무슨 하사란 밀인가!“

 

이어 중산왕 유창(경제의 9자 유승의 아들)의 아들 유장, 제효왕 유장려의 손자 유택과 함께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약속했다. 거짓으로 무제 때 조서를 받았으므로 금지되었던 지방관리를 임명하고 비상시를 대비한 무장을 강행했다. 낭중 성진이 유단을 꼬드기며 말했다.

 

      ”  대왕이 항제가 될 기회를 놓쳤습니다만

         혼자라도 일어나셔야 되찾을 수 있지 가만히 앉아있으면 못 얻습니다.

         대왕이 홀로 일어나시면 나라 안 모든 아녀자들도 

         어깨를 털면서 대왕을 따를 것입니다.“ 

 

유단은 즉시 유택과 모의를 하고 간교한 문서를 썼다.

    

      ” 어린 황제 유불릉은 무제의 아들이 아닌데도

        대신들이 공모하여 세웠으니

        마땅히 천하가 힘을 합쳐서 도벌해야 한다.“

 

사람을 전국 지방으로 보내 백성들을 흔들어 소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유택은 모의 후 돌아와 임치에서 군대를 일으켜 청주자사 준불의를 살해하기로 계획했다. 유단은 국내 모든 간교한 인물들을 초치하고 동과 철을 긁어모아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으며 여러 번 마차와 기병과 기계화군대를 검열하였고 마치고나서는 군대와 백성을 이끌고 크게 수렵을 통하여 훈련을 하면서 거사 날을 기다렸다. 낭중 한의가 여러 차례 반란을 말리자 한의 등 열다섯 명을 죽였다.   

 

마침 병후 유성이 유택의 역모계획을 알게 되어 자사 준불의에게 보고를 올렸고 준불의는 유택을 전격 체포하고 감옥에 가둔 뒤 조정에 보고했다. 소제는 대홍려의  관리를 현장으로 보내 처리하게 한 뒤 연왕을 끌고 장안으로 왔다. 조서를 내려서 종친인 것을 이유로 해서 유택의 죄를 다루지 말라고 했지만 모두 복주를 당했다. 준불의는 공로를 인정받아 경조윤으로 들어왔다. (BC87)  


<20> 명신 준불의隽不疑를 만든 어머니(BC86)

 

준불의가 경조윤(서울특별시장)이 되고서 관리들과 백성들의 신망은 더욱 깊어졌다. 그 이유는 그의 어머니 때문이다. 준불의가 매번 관내를 순찰할 때마다 감옥에 잡혀있던 죄수혐의자들이 석방되었는데 그 까닭은 항상 그 모친이 준불의에게 이렇게 물었다.

 

    ” 재판을 다시 하라고 지시한 게 있었는냐?

      다시 살려 준 사람이 몇이나 되었는냐?“      

 

준불의가 재심하라고 지시한 사건이 평소보다 많았다고 하면 모친은 기뻐했고 재심 결정사건이 없어서 아무도 출옥하지 못했다고 하면 모친은 노하며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준불의의 판결은 엄격했지만 잔혹하지는 않았던 것(严而不残)이다.   

 

 

<21> 상관안이 개장공주의 애인을 통해 딸을 궁중에 밀어넣다.(BC84)

 

처음에 곽광은 상관걸과 사이가 좋았다. 곽광이 휴가를 얻어 집으로 나갈 때 마다 상관걸이 그를 대신해서 궁으로 들어와 사무를 보았다. 곽광의 딸이 상관걸의 며느리가 되어 딸을 얻었는데 다섯 살 쯤 되었을 때 그 딸의 부친 상관안은 곽광을 통해 딸을 궁중으로 밀어 넣고 싶었다. 곽광은 그 딸이 자신의 외손녀였지만 아직 어리다고 판단해 상관안의 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무제의 딸 개장공주盖长公主는 소제의 누나였는데 정외인이라는 아들의 빈객과 사통하고 있었다. 평소 정외인과 친분이 있던 상관안은 정외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 제 딸은 용모단정하므로 

        개장공주 덕으로 입궁하여 장차 황후가 된다면

        저의 부자가 조정에 있는 까닭에 초방의 권세 椒房之重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것의 성패는 오로지 귀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한 황실의 역사를 보면 열후가 된 사람은 모두 황족과 결혼을 하게했습니다.  

        귀하는 열후에 책봉되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초방이란 황후가 거처하는 궁전 초방전을 뜻한다. 정외인은 크게 기뻐하며 개장공주에게 알렸고 개장공주가 마침내 소제에게 말하여 상관안의 딸을 첩여로 들였다. 상관안은 기도위로 임명했다.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관씨를 소제의 황후로 삼았다. 그 아버지 상관안은 거기장군으로 승진했다.(BC83)

 


<22> 새끼수소 황독(黄犊)수레를 탄 성방수成方遂(BC82)

 

어떤 남자가 스스로를 위태자(반역을 일으켰다가 무제의 장남 유거)라고 하면서 새끼 수소가 모는 수레를 타고 황궁의 북궐에 나타났다. 북문을 지키는 관리는 즉시 상부에 그 사실을 보고했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공경장군들을 시켜 가서 확인해 보라고 지시했다. 장안 시내에서는 수 만명이 모여 그 사람을 지켜보았다. 우장군 정돈륵은 군사를 모아 비상시를 대비했다. 현장에 도착한 공경장군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 망설이고 있었다. 준불의는 도착하자마자 관리들을 꾸짖으며 즉시 포박하라고 명령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소란을 피우는 것도 아닙니다.“

 

준불의가 말했다.

 

    ” 제군들은 어찌 위태자를 염려하십니까?

      옛날 위괴외가 명멸을 거역하고 도망칠 때 

      위첩(위괴외 아들)은 도망치지 않았고

      <춘추>에서는 위첩이 옳다고 했습니다.

      위태자가 선제에게 죄를 지었는데

      즉시 죽지 않고 지금 나타났다 하더라도 죄인일 뿐입니다.“     

 

즉각 그 사람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춘추시대 위나라 영공의 아들 위괴외가 태자였는데 아버지에 죄를 짓고 晉으로 도망갔었다.

영공이 죽고 위괴외 아들이자 손자인 위첩이 계승했다. 진나라 조앙은 망명와 있던 위괴외를 데리고 위나라로 들어가려고 척에 도착했다. 제나라 국하와 위나라 석만고가 척을 포위하고서 위괴외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논란을 벌인 끝에 받아들이지 ㅇ낳기로 하였다. 춘추공양전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위괴첩)이 옳다고 평가했다.  

 

소제는 대장군 곽광과 함께 준불의의 결단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 공경대신은 당연히 경술에 조예가 깊고 대의에 밝은 자 여야 합니다.“

 

그 후 준불의의 명성은 조정에 널리 퍼졌고 직위를 갖고있던 모든 대신공경들은 자신이 준불의에게 못 미친다는 것을 인정했다. 수사관이 깊이 수사해 본 결과 그 사람은 본래 하양사람으로써 성방수라는 이름을 가진 점쟁이 사기꾼이었다. 그가 살고 있던 호라는 지역으로 위태자 유건이 피신했었는데 그 때 유건의 부하가 자신을 찾아와 점을 본 적이 있었다. 그가 점쟁이에게 말하기를 

 

    ” 그대 모습이 위태자와 너무 흡사하오.“  

 

성방수는 그 말을 듣고 그것을 이용하여 부귀를 누릴 생각으로 황독을 타고 궁궐로 갔던 것이다. 무망부도诬罔不道 죄에 연루되어 요참되었다.

 

 

<23> 패악한 황제 장인 상관안(BC82) 

 

이 해 6월 상관안은 상락후가 되었다. 황제의 장인 된 그는 날로 교만하고 음탕해져서 궁궐 대전 안에서 하사품을 받고 빈객을 맞이하고서는 

 

     ” 내 사위가 황제와 같이 더불어 마시니 얼마나 큰 기쁨인가.

       

황제의 옷을 자신 것과 비교해 보고는 돌아가서 자신의 옷을 태워버리게 하였다. 아들이 죽자 크게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고 울었지만 완악하고 패역한 것은 바뀌지 않았다.

 

간대부 두연년은 무제의 사치함과 무리한 정벌을 겪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곽광에게 이렇게 충언을 올렸다.

 

      “ 최근 몇 년 동안 작황이 좋지 않아서 

        유랑민들이 많이 고향을 떠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효문제 때의 정치를 좇아서

        검약하고 관대온화하며 천심과 백성들의 민의를 따라 정치를 펼쳐야 합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다시 풍작을 회복할 것입니다.”

    

곽광은 그의 말을 수용했다. 두연년은 어사대부 두주의 아들이다. (BC82)


<24> 염철지의(盐铁之议)가 일어나다.(BC81)

 

흉년이 오래 지속되면서 나라 경제가 어려 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조야에 묻혀있는 현량 문사들에게 백성들의 질고를 해소하고 교화를 이룰 수 있는 요체에 대해 물었다. 모두 들 말했다.

 

    “ 염철세금, 주세, 균수관 및 이익을 탐하는 행위를 폐지하고

      위에서 몸소 검약함을 보여야 교화가 가능할 것입니다.”

 

국가의 여러 세제를 없애자는 것이었다.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상홍양은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 이 세금들은 국가의 대업입니다.

      그것으로 사방의 도적들을 막고 변방 백성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폐지할 수 없습니다.”      

이로부터 염철세금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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