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건청의 문학산책 <5>詩의 홍수 속에서 더욱 빛나는 참된 詩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11월27일 16시30분
  • 최종수정 2021년11월25일 12시15분

작성자

메타정보

  • 4

본문

“좋은 시는 ‘달리 할 것도 없고 해서 써보는 심심파적 말놀이’가 아니다. 꿈 많던 청소년 시절 많은 사람들이 가슴 속에 솟구치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성인이 되면서 사는 일에 바빠 멀리했던 ‘표현에의 욕구’를 되 돌이켜 보는 일은 자연스런 충동일 수도 있을 수 있겠다. 이런 사람들은 좋은 시를 골라 충실하게 읽는 독자가 되어 그런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직장 정년하고 나서 달리 할 일도 없고 하니 시나 써볼까 한다’는 사람을 만나곤 한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참담하기도 하고 비감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좋은 시는 ‘달리 할 것도 없고 해서 써보는 심심파적 말놀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꿈 많던 청소년 시절 많은 사람들이 가슴 속에 솟구치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성인이 되면서 사는 일에 바빠 멀리했던 ‘표현에의 욕구’를 되 돌이켜 보는 일은 자연스런 충동일 수도 있을 수 있겠다. 이런 사람들은 좋은 시를 골라 충실하게 읽는 독자가 되어 그런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이 독자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시인’을 꿈꾸고, 실제로 이런 저런 편법들을 거쳐 실제로 ‘등단’이란 걸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요즘 수준 이하의 시들이 넘쳐나고, 너도 나도 시인이 되었노라 명함들을 돌리는 사태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이런 세태에서 연유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찌라시 수준의 우스개 글들이 시로 둔갑해 횡행하고, 시정잡배들까지 시인이 되었다며 명함을 찍어 돌린다. 시집 내는 일이 쉬워지다 보니 별의 별 시집들도 난무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결과적으로 진정한 시의 독자들을 시로부터 멀리하게 만들고, 시인이라는 명칭 자체가 희화화되어 불리는 경우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난삽해진 시단 풍경들이, 시가 한 시대의 등불이며, 희망적 전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냉철한 성찰의 안목이 필요한 이유이다.

 

 “시는 짧은 형식 속에 고도로 숙련된 사유와 상상력을 담아내는 예술 장르이다. 단 몇 줄의 시에 천둥 벼락같은 감동을 담아내며, 독자에게 평생 뇌리에 남는 그리움의 옹달샘을 남겨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천부적인 재질과 오랜 정진을 거쳐서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참된 시인의 경지인 것이다."

 

지금 한국에는 200 여 종이 넘는 유명무명의 문학잡지들이 간행되고 있고 이들 잡지들 중 대부분이 영세한 것들이어서 간행 자체를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들 잡지의 영세성과 ‘시나 써 볼까’하는 사람들의 허망한 욕구가 맞아 떨어지면서 덜 익은 시인들이 넘쳐나는 세태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시는 짧은 형식 속에 고도로 숙련된 사유와 상상력을 담아내는 예술 장르이다. 단 몇 줄의 시에 천둥 벼락같은 감동을 담아내며, 독자에게 평생 뇌리에 남는 그리움의 옹달샘을 남겨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천부적인 재질과 오랜 정진을 거쳐서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참된 시인의 경지인 것이다.

 

그런데도,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시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내가 문청시절, 스승이셨던 박목월 선생님께 여쭤본 적이 있었다.  “선생님, 시인이 되기 위해서 천부적인 재질과 후천적 노력이 어느 정도 될까요?” 선생님 말씀이 “재능이 6이면 노력이 4쯤 되는 게 아닐까?”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그런데 나는 요즘 생각하기를 천부적인 재능이 7쯤 되고 개인이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3쯤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좋은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적 재질을 타고나야 되는 것이란 말이 되겠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너무 많은 자칭 시인들이 범람하고 있고, 너무 많은 시집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 마치 1920년대 아마추어 문단시대로 회귀해버린 느낌이 든다. 시의 애호가로 남아 있어야 할 사람들이 시판에 넘쳐나고, 이제는 시단의 복판에까지 몰려들고 있다. 그들에게서는 프로페셔널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마치 치장을 위한 액세서리 하나쯤 마련하는 호사 취미에 머물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은 그들끼리 무슨 협회를 만들기도 하고, 그들끼리 잡지를 만들기도 한다.

 

  내가 시인협회 회장을 할 때,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신입회원을 인준하는 일이었다. 떳떳하지 않게 등단이라는 걸 한 사람들일 수록 회원입회 추천(한국시인협회의 경우 임원 2사람의 추천, 2년 이내 3편 이상 문예지 발표)을 받아 입회원서를 제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시가 욕구불만을 노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욕구불만을 노래할 경우에도 정제된 형식과 구조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시가 터져 나오는 불만을 혹은 갈망을 모두 뱉어내는 토사물의 집하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에 발표되는 상당수 젊은 시인들의 시를 나는 읽어낼 수가 없다. 시를 존재 자체가 겪는 욕구불만의 배설체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은 시들이 너무 많다. 시가 욕구불만을 노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욕구불만을 노래할 경우에도 정제된 형식과 구조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시가 터져 나오는 불만을 혹은 갈망을 모두 뱉어내는 토사물의 집하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발표되는 시들의 상당수가 20행, 30행을 넘는 긴 것들이다. 물론 꼭 필요한 경우 30행, 40행을 넘길 수 있겠지만 시의 행수가 이처럼 길어진 것은 비정상적이다. 단언컨대 이처럼 긴 시들은 시적 수련이 부족한 작가들의 능력 부족에서 연유된 것이라 생각한다. 장시의 경우라면, 장시로 지녀야 할 구조적 일관성과 필연성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나는 잘 쓴 현대시조에서 현대시가 나아가야 할 향방을 찾아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현대시의 시정신과 현대시조의 정제미가 일체화 될 때, 무잡한 한국현대시의 출구가 있지 않을까 싶다.

 

“시(詩)잡지의 편집자는 시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인도해가야 하는 것이고, 좋은 시를 제시해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 문학지의 편집자는 필수적으로 비평적 안목을 지녀야 한다.” 

 

시 문학지는 단순히 책을 만들어내는 것에서 편집자의 책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시 문학잡지는 좋은 작품을 선정해서 발표함으로써 독자와의 만남의 장을 만들어주어야 하겠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단을 교통정리 해줘야 하는 소명도 지닌다. 시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인도해가야 하는 것이고, 좋은 시를 제시해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 문학지의 편집자는 필수적으로 비평적 안목을 지녀야 한다. 요즘 시 문학지들은 동인지화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잡지든 대개 그 잡지를 통해서 등단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서 작품을 발표하고 거기에 월평이나 작품평 같은 것도 자기 잡지에 실린 것 위주로 평을 하고 있다. 모름지기 범 시단의 공기로 존재할 때 참 가치를 지니는 것이고, 편집 방향을 시단 전체를 향해  펼쳐갈 때 바른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문학매체와 관련해서 주목해 보아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기성시단과 다른 방법으로 작품활동이 전개되는 현상이다. 그 중에 하나가  SNS를 발표매체로 활동하는 시인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직도 나름대로 시가 많은 사람들에게 선호되고 있는 현상이라 생각되어 긍정적인 측면도 많다고 생각한다. 역시 내가 시협회장 할 때, 트위터를 통해 시를 알리는 사업을 벌인 적이 있었다. 아침 8시, 저녁 9시, 매일 2편의 좋은 시를 트위터 상에 게재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2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시 보급 운동으로 환호를 받기도 했었다. 공신력을 지닌 단체가 좋은 시를 선정하고, 선정된 시를 널리 알리는 이런 방식이 좋은 시의 보급을 위한 SNS의 순기능이라 생각한다.

 

  물론 SNS의 역기능도 많을 것이다.  SNS를 장악하고 있는 시들의 상당수가 연파조의 시들인 것, 누락, 행갈이 등의 오류, 동명이인의 시들이 뒤섞여 전파되는 것, 시의 판권 문제 등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모하고 있고, IT환경 속에서 사유하고 감성을 공유하는 세대가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묵과할 수 없을 것이다. 종이책을 매체로 하고 있는 현대시의 소통구조도 심각한 도전 앞에 놓여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좋은 시를 어떻게 선별해 읽을까?"

 

우리나라에서는 놀랄 만큼 많은 시들이 발표되고 있다. 2014년판 『문예연감』을 보니 1년에 약 17,000편의 시가 발표되었고, 거기 시를 발표한 시인만도 약 2,600명 정도 된다. 이렇게 많이 발표되고 있는 시 중에서 상당수 시편들이 시의 기본을 익히지 못한 것들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시는 상당량의 몰입, 용맹정진의 과정을 거치면서 겨우 도달할 수 있는 정치한 언어의 구조물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라야 독자에게 공감되는 것이고 오랜 생명력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선 매달 1200여 편의 시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셈인데, 상당수의 시편들이 왜 썼고, 왜 발표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가네    

 - 서정주 [동천]

 

좋은 시는 난해하지 않은 말로도 깊고 심오한 비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시는 쉬운 말로 써졌으면서도 읽으면 읽을수록 깊은 깨달음을 준다. 시는 진술적 산문과는 판이한 존재양식으로 구조를 이룬 실체이다. 한 편의 시가 지니는 함축을 깊이 있게 꿰뚫어보고, 자신의 체험과의 접점을 찾으며, 시 자체가 지니는 말의 음성적 요소까지를 세세히 살피는 독자라면 이런 시의 비의 앞에서 깊은 감동에 젖을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아버지가 가련한 아들을 껴안고 잠든

마른 이불과 따끈따끈한 요리를 꿈꾸며 잠든 밤 

큰 슬픔이 작은 슬픔을 껴안고 잠든 밤 

소금 같은 싸락눈이 신문지 갈피를 넘기며 

염장을 지르는, 지하역의 겨울밤  

- 박후기[자반고등어]

 

 슬픔과 정서가 금강석의 언어로 응축되어 있다. 박후기의 ‘자반고등어’의 경우 시의 표제와 시의 본문이 은유의 관계로 결합되면서 방대한 내포를 형성해내고 있다. 소금에 절여진 채, 큰 고등어가 보다 작은 고등어를 포개 안고 있는 한 손 간고등어와, 지하역 신문지 위에서 노숙하고 있는 부자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파생해내는 슬픔이 진한 공명으로 울린다. 이런 시가 담고 있는 현실이나, 사회 구조적 모순 등은 얼마든지 생짜 발언으로 표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과감한 생략과, 단절과, 비약을 선택함으로써 방대한 질량을 담은 짧은 언어 구조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이우걸[팽이]

 

나는 잘 쓴 현대시조에서 현대시가 나아가야 할 향방을 찾아볼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보곤 한다. 현대시의 시정신과 현대시조의 정제미가 일체화 될 때, 무잡한 한국현대시의 출구가 있지 않을까싶은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박재삼의 시조, 이근배의 시조들 중 현대시의 시정신과 현대시조의 정제된 형태의 수준 높은 융합을 본다. 최근 『채송화. 시(詩)앗』이란 동인지를 본 적이 있다. 10행 이내의 시들 속에 함축을 담아내는 실험들을 하고 있었다.

 

여자가 있었네

푸른 눈동자의 여자가 있었네

가늘고 긴 휘파람을 불면

푸득푸득! 햇살을 털고 어느 사이엔가 내 곁으로 와 파도치던 여자, 밀주든 독주든 그윽이 잔 치던 여자

정성껏 비을 걷어내고 껍질을 벗겨

한 점 두 점 제 살을 발라 밤새도록 내게 먹이던 여자

곤이며, 애며 남김없이 제 것을 다 주던 여자

그리하여 은빛 가시와 비린 뼈만 남은 여자

해풍이 불 때면 바다를 등지고 앉아 고개를 떨구던

그 여자

누나가 되어 날 쓰다듬어 주었고

아내가 되어 양귀비꽃처럼 활짝 웃던 여자

 

우리 모두가 붙어먹던 여자

목 타는 새벽녘엔 제 젖을 물려주던 여자

토닥토닥 등 두드리며 잠 재워주던 여자

잠 깨니 사라져 버렸네

별이 간 길 따라 떠나버렸네

입 안엔 아직 비린 기억이 꿈틀대는데

푸른 눈알 파먹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네

 

― 김요일 〈인어 이야기〉

 

 

소멸된 것, 사라져 버려서 이제는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을 최초의 자리로 복원시켜 보려는 염원은 모든 사람에게 간절한 것이 되게 마련이다. 그리움이 간절한 것일수록 소멸된 빈자리는 큰 것이 된다. 시인은 이제는 소멸되어 버리고 없는 그리움의 자리에서 곡진한 말들을 찾아내고 있으며, 그렇게 찾아내진 곡진한 말들이 ‘그 여자’를 불러낸다.

시인이 되살려 내고 있는 ‘그 여자’는 “한 점 두 점 제 살을 발라 밤새도록 내게 먹이던 여자/ 곤이며, 애며 남김없이 제 것을 다 주던 여자/ 그리하여 은빛 가시와 비린 뼈만 남은 여자”이며, “누나가 되어 날 쓰다듬어 주었고/ 아내가 되어 양귀비꽃처럼 활짝 웃던 여자”이며, “목 타는 새벽녘엔 제 젖을 물려주던 여자/ 토닥토닥 등 두드리며 잠 재워주던 여자”다. 이 시에서 시인이 불러내 준 ‘여자’는 온전한 헌신과 희생의 모습으로 여실하며, ‘누나’나 ‘아내’의 모습으로 자애롭다. 시인의 말들이 오감의 언어로 살아 움직이면서 망극한 성애의 기억을 현재의 시간 속에 되살려내 주고 있다.

 

 인간의 영혼을 상승시키며 초월적인 힘으로 사물과 현실이 지닌 안일과 타성 속에서 ‘발견’의 지평을 열어 보여주는 시가 좋은 시이다. 시는 인간성의 핵심과 연관되어 있는 예술이다. 인간의 정서와 상상력과 사유에 기반하는 예술이며, 인간 영혼을 심오한 가치로 고양시켜 주는 예술이다.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피와 살과 뼈로 구성된 유한 존재이고 미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지만 정서와 상상력과 사유와 영혼을 통해서 영속하는 가치가 되기도 한다.

 

단언컨대 요즘 한국시에 넘쳐나는. 길이가 긴 시편들은 시적 수련이 부족한 사람들의 표현 능력 부족에서 연유된 것이라 생각한다.  

 

한 편의 시가 지니는 진미를 이해하려면 한 편의 시를 최소한 한 편의 시를 30분은 읽어라, 그것이 어려우면 열 번 정도만이라도 되짚어가며 천천히 읽어라”

 

흔히, 난해한 시는 나쁜 시라는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많은 것 같지만, 높은 차원의 비유나 중층 비유로 해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시들 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난해해진 시들은 공들여 읽을수록 발견의 광휘를 보여준다. 인용한 서정주의‘동천’같은 시가 좋은 난해시의 전형을 보여주는 시라고 생각한다. 작품 속으로 독자를 깊이 끌어들이는 시, 견고한 비유 속에 놀라운 섬광을 담고 있어 읽을수록 큰 감동을 건네주는 시인 셈이다. 우주를 상상력의 범주로 포괄하고 있다.  

 

 나는 문학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읽고 싶은 시를 찾아, 그 시의 진미를 이해하려면 한 편의 시를 최소한 한 편의 시를 30분은 읽어라, 그것이 어려우면 열 번 정도만이라도 되짚어가며 천천히 읽으라고 충고하곤 했었다.

 

지금, 한국 시는 감각, 상상력, 영감, 문체, 이런 것들에 대한 가치를 보다 소중하게 일깨워가야 한다. 물론 이런 요소들은 시가 지니는 핵심적인 요소들이다. 그러니까 이제 한국 시는 시의 근본을 돌이켜보고 순정성의 바탕에서 시를 성찰해보았으면 한다. 새로운 생명으로 숨 쉬는 시어들을 만나야 하는 것이고, 시가 그런 시어로 만든 구조물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전제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최적의 구조를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시인의 능력이다.

 

<ifsPOST>​ 

 

 

4
  • 기사입력 2021년11월27일 16시30분
  • 최종수정 2021년11월25일 12시15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